1945년 11월 11일[이데일리 장영락 기자]
페이지 정보
작성자 sans339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5-11-11 14:10본문
통화종료후문자발송
1945년 11월 11일[이데일리 장영락 기자] ‘빼빼로 데이’로 모두 기억하는 11월 11일은 한국 해군 창설 기념일이기도 하다. 일제 시대 일본군 출신이 대거 참여했던 육군과 달리 해군은 민간 상선 경력자들이 주축이 돼 결성됐다.오늘날 ‘해군의 아버지’로 통하는 독립운동가 손원일은 광복 직후에 해군을 만들기 위해 먼저 해사대를 모집했다. ‘조국 광복에 즈음하여 이 나라 해양과 국토를 지킬 뜻있는 동지들을 구함’이라고 적힌 해사대 모집 벽보를 보고 80여명의 대원들이 모였고, 이들은 자금 확보를 위한 모색 끝에 일제강점기 이미 만들어진 조선해사보국단과 합쳐 조선해사협회를 조직했다. 이후 손원일은 11월 11일을 해군이 선비 중에 선비라는 뜻에서 창설일로 정해 미군정청과 협의 끝에 해방병단을 창설했다. 해방병단은 해안경비대로 시작해 향후 해군으로 전환할 것을 약속받았고 총 70명이 참여했다. 미군정은 당시 다른 사설 군사 단체들은 모두 해산시켰음에도 장래 한국 해군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인정해 해방병단을 준군사조직으로 공식 인가했다.해방병단은 이듬해 1월 국방사령부에 편입됐고 생도 교육도 시작했다. 2월부터는 국방사령부와 주요 항구도시에 해군 기지를 창설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해 4월부터 주요 도시에 기지를 차례로 창설했다.6월부터는 진해 근해르 중심으로 해상경비를 시작했고, 미군청정이 군정법령을 공포해 해방병단은 조선해안경비대로 이름도 변경했다. 손원일을 총사령관 직책을 받아 조직을 해군 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정비 작업을 시작했다.이후 미군정청한테서 인수한 함정을 포함 전력을 갖춰, 8월에는 38선 이남 해안경비임무도 미 해군한테서 인수하게 된다. 1948년 해안경비대는 대한민국 정부 정식 수립에 따라 1948년 9월 5일 해군으로 비로소 발족한다.감리회 목사로 독립유공자인 손정도의 아들로 태어난 손원일은 그 자신도 젊은 시절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일제 체포돼 고문까지 당했다. 해방 후에는 항해사로 쌓은 경력을 바탕으로 해군 건립에 매진했고 그 결실을 보며 초대 해군참모총장, 5대 국방부장관도 역임했다. 그의 이름은 2007년 처1945년 11월 11일[이데일리 장영락 기자] ‘빼빼로 데이’로 모두 기억하는 11월 11일은 한국 해군 창설 기념일이기도 하다. 일제 시대 일본군 출신이 대거 참여했던 육군과 달리 해군은 민간 상선 경력자들이 주축이 돼 결성됐다.오늘날 ‘해군의 아버지’로 통하는 독립운동가 손원일은 광복 직후에 해군을 만들기 위해 먼저 해사대를 모집했다. ‘조국 광복에 즈음하여 이 나라 해양과 국토를 지킬 뜻있는 동지들을 구함’이라고 적힌 해사대 모집 벽보를 보고 80여명의 대원들이 모였고, 이들은 자금 확보를 위한 모색 끝에 일제강점기 이미 만들어진 조선해사보국단과 합쳐 조선해사협회를 조직했다. 이후 손원일은 11월 11일을 해군이 선비 중에 선비라는 뜻에서 창설일로 정해 미군정청과 협의 끝에 해방병단을 창설했다. 해방병단은 해안경비대로 시작해 향후 해군으로 전환할 것을 약속받았고 총 70명이 참여했다. 미군정은 당시 다른 사설 군사 단체들은 모두 해산시켰음에도 장래 한국 해군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인정해 해방병단을 준군사조직으로 공식 인가했다.해방병단은 이듬해 1월 국방사령부에 편입됐고 생도 교육도 시작했다. 2월부터는 국방사령부와 주요 항구도시에 해군 기지를 창설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해 4월부터 주요 도시에 기지를 차례로 창설했다.6월부터는 진해 근해르 중심으로 해상경비를 시작했고, 미군청정이 군정법령을 공포해 해방병단은 조선해안경비대로 이름도 변경했다. 손원일을 총사령관 직책을 받아 조직을 해군 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정비 작업을 시작했다.이후 미군정청한테서 인수한 함정을 포함 전력을 갖춰, 8월에는 38선 이남 해안경비임무도 미 해군한테서 인수하게 된다. 1948년 해안경비대는 대한민국 정부 정식 수립에 따라 1948년 9월 5일 해군으로 비로소 발족한다.감리회 목사로 독립유공자인 손정도의 아들로 태어난 손원일은 그 자신도 젊은 시절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일제 체포돼 고문까지 당했다. 해방 후에는 항해사로 쌓은 경력을 바탕으로 해군 건립에 매진했고 그 결실을 보며 초대 해군참모총장, 5대 국방부장관도 역임했다. 그의 이름은 2007년 처음 취역한 배수량 1800톤의 ‘손원일급 잠수함’에도 남아있다.
통화종료후문자발송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